25년 전 이스라엘 베테랑 정치인 시몬 페레스가 외쳤던 ‘새로운 중동’이 드디어 도래한 것일까. 아니면 팔레스타인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아랍국가와 관계를 정상화하는 방식이 아닌 그 반대가 해법이라는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독트린이 통한 것일까. 여하튼 이스라엘과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관계 정상화는 중동에 지각 변동을 불러올 엄청난 사건임은 틀림없다. 72년의 짧은 이스라엘 역사에 비추어도 기념비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역내에 중대한 함의를 던지기 때문이다.
우선 이번 협정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과 아랍국 간의 네 번째 합의다. 이스라엘은 1979년 이집트, 1994년 요르단과 평화협정을 맺었고 1999년 북아프리카의 모리타니와 관계 정상화에 합의했다. 모리타니는 10년 뒤인 2009년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을 이유로 협정에서 탈퇴했다. 이집트와 요르단 두 국가는 이스라엘과 전쟁에서 치열하게 싸운 국가였고 모리타니 UAE는 전쟁 경험이 없는 국가다.
두 번째 함의는 이스라엘과 국경을 공유하지 않는 걸프 아랍국가와의 최초의 정상화라는 점이다. UAE뿐 아니라 사우디아라비아, 바레인, 쿠웨이트, 오만 등도 이미 몇 년 동안 이스라엘과 비공식적인 관계를 유지해왔고 이번 협정에 대한 아랍권의 반응도 나쁘지 않다. UAE 외에 다른 국가들도 관계 개선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이번 합의는 1993년 오슬로협정 이후 팔레스타인과의 평화무드가 조성된 시기 페레스가 유럽연합(EU)을 모델로 제안한 중동 구상과 일맥상통한다. 페레스는 중동 국가들이 불신과 적의로 전쟁을 일삼기보다 정치·경제적 통합으로 관계를 정상화하고 공동 번영을 누리자고 제안했지만 아랍국들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아랍은 이스라엘에 아랍 경제를 종속시켜 역내 우위를 점하려는 계략이라고 판단했으며 팔레스타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시대는 변했고 많은 아랍국가는 이-팔 분쟁에서 팔레스타인 편을 드는 데 지쳐 있다. 이번 합의는 더이상 팔레스타인 문제가 이스라엘과 아랍국가의 관계 정상화에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혁명적 변화를 예고한다.
왜 UAE였을까. UAE는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대통령과 악연이 있다. 압바스 대통령은 2011년 자신이 속한 집권 ‘파타’ 내의 정적 무하마드 다흘란을 추방했다. 압바스의 지도력에 도전하던 눈엣가시 다흘란은 추방당한 후 모하메드 빈 자예드 아부다비 왕세제의 보호를 받았다. 모하메드 왕세제가 압바스와 다흘란의 화해를 주선했으나 통하지 않았고 UAE와 압바스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이번 합의를 막기 위한 압바스의 외교는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이유는 이란이다. 걸프 아랍국들에 가장 큰 안보 위협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란이다. 지난해 사우디 석유기업 아람코가 이란이 개입된 것으로 보이는 공격을 받자 주변 아랍국들은 물론 이스라엘도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이란이 드론과 순항미사일을 갖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사우디의 방공망을 뚫고 정확히 목표물을 타격한 고도의 작전 능력을 보여줄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역내 영향력을 키우는 이란의 행보도 걸프를 고민에 빠트렸다. 걸프 아랍국 대부분은 이란이라는 공동의 적과 싸우고 있는 이스라엘의 방산기술과 정보를 얻기 위해 최소 10년 이상 비공식적으로 이스라엘과 교류해 왔다. 수니 이슬람의 종주국 사우디는 이스라엘과의 수교가 아직은 부담스러운 반면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UAE가 처음으로 관계 개선을 모색한 것이다.
모하메드 왕세제가 미국을 상대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이용한다는 분석도 있다. 미 의회는 예멘 내전 개입을 이유로 UAE 제재안을 준비중이고 사우디 무기판매도 중단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번 조치는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로 이를 무마하려는 왕세제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이미 미국이 최신 전투기 F-35와 드론을 UAE에 판매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만약 미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낙선할 경우를 대비한 보험 차원일 수도 있다.
갑작스러운 UAE와의 관계 정상화에 이스라엘 정치권은 물론 지식인들도 적잖이 놀란 모양새다. 우파진영은 요르단강 서안 정착촌 합병 절차에 들어가겠다고 호언장담한 네타냐후의 배신에 크게 실망한 눈치다. 지난 선거 기간에 정착촌을 이스라엘 영토로 합병하겠다는 공약을 반긴 우파가 많았다. 미국의 동의 없이는 합병이 어렵다는 냉혹한 현실과 함께, 네타냐후와 미국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좌파 진영은 팔레스타인과의 평화과정을 뒤로 미루고 아랍국가와 정상화를 이룰 수 있다는 네타냐후 독트린이 실현되자 당황한 기색이다. 지난 50년간 중동 정치의 패러다임은 ‘중동 문제의 핵심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며 이것만 해결되면 중동에 평화가 정착된다’는 것이었다. 이 패러다임은 2011년 아랍의 봄으로 시리아, 리비아, 예멘 내전이 시작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으나 여전히 유럽과 미국의 정책결정권자들은 이-팔 분쟁 해결을 중동의 만병통치약으로 믿고 있다.
이번에 깨져나간 두 번째 패러다임은 ‘이-팔 분쟁의 핵심은 팔레스타인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와 동예루살렘의 불법 정착촌 건설이며 이를 중단하고 영토를 맞교환해야 분쟁을 풀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스라엘도 나름 노력을 했다. 2005년 이스라엘은 가자의 정착촌 21곳을 없애고 완전철수했다. 이후 가자지구는 하마스가 차지했다. 2009년 버락 오바마 미 행정부는 평화협상 재개 조건으로 서안의 정착촌 중단 건설을 요구했고 네타냐후 총리는 이를 수용했다. 그러나 10개월이 되도록 팔레스타인은 “동예루살렘 정착촌 건설이 중단되지 않았다”며 협상장에 나오지 않았다.
2008년 에후드 올메르트 당시 이스라엘 총리는 요르단강 서안의 6.3%만 합병하고 나머지는 모두 반환하겠다고 했다. “나보다 더 나은 제안을 할 이스라엘 총리는 50년 뒤에나 나올지 모르겠다”며 설득했으나 압바스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스라엘 여론을 고려하면 모두 쉽지 않은 제안들이었지만 팔레스타인을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했다.
네타냐후 독트린은 팔레스타인 지도부의 ‘역사적 결정’을 기다리기보다는 주변 아랍국가와 먼저 관계를 정상화한 뒤 팔레스타인과 평화협상을 추진하는 것이 훨씬 쉬울 것이라는 가정에 기초한 것이다. 이스라엘 좌파는 네타냐후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고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에 모든 역량을 쏟아부으라고 요구해 왔지만 이제 입장이 애매해졌다.
이스라엘-아랍 분쟁의 역사라는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이스라엘-UAE 합의는 필연적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스라엘-아랍 분쟁은 이미 1973년의 전면전을 끝으로 쇠퇴하기 시작했고 그후로는 그저 관성이 이어져왔을 뿐이다. 이후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해방운동(PLO), 하마스, 헤즈볼라 같은 비국가 단체와 전쟁을 했을뿐 아랍국가와는 전쟁에 휘말리지 않았다. 중동 역내 분쟁도 이란이 주도하는 시아파 세력과 수니 아랍 간 대결로 양상이 바뀌었다. 아랍과 이스라엘의 보이지 않는 동맹이 단적으로 드러난 것은 2006년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전쟁 때였다. 한 달 이상 이스라엘이 레바논 헤즈볼라를 몰아붙일 때 아랍은 오히려 헤즈볼라를 완전히 제압해야 한다며 이스라엘을 지지했다.
지금 중동은 세 진영의 헤게모니 다툼으로 요약된다. 강대국의 영향력이 과거보다 약해지고 아랍 개별 국가의 민족주의보다는 종교와 인종 정체성을 축으로 합종연횡이 이뤄져 왔다. 이란을 중심으로 레바논 헤즈볼라, 시리아, 이라크, 예멘의 후티로 이어지는 시아 진영이 있고 그 반대편에 사우디와 UAE가 중심이 된 수니 진영이 있다. 또 하나의 진영은 카타르, 터키와 리비아 통합정부(GNA) 연합이다. 카타르와 터키는 무슬림형제단이나 하마스 같은 이슬람주의 운동 조직을 적극 지원하면서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수니 진영에 본격 협력하면 시아 진영과 충돌이 불가피하고 이스라엘에도 위험 요인이 될 뿐 아니라 역내 헤게모니 다툼에 큰 변수가 될 것이다.
근래 역내 정치변동에 이스라엘 변수가 매우 커졌다고 여길 만한 사건이 잦았다. 이스라엘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핵합의(JCPOA)를 일방적으로 탈퇴한 결정적인 이유가 네타냐후 총리의 끈질긴 설득 때문이라고 보도해왔다. 이스라엘은 2018년 테헤란 중심부에 숨겨진 이란 핵개발 문서를 대량 확보했다고 밝혔으며 중요 문서를 미국에 넘긴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달 이란 나탄즈 핵시설 등에 일련의 폭발이 일어났는데 그 배후에 이스라엘이 있다는 의심도 커지고 있다. 이스라엘은 국제사회가 이란 핵개발을 막지 못하면 단독으로 해결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해왔다. 이스라엘과 이란의 보이지 않는 전쟁은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August 27, 2020 at 08:37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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